일·생활 균형 실태와 개선을 위한 정책 과제

노동사회

일·생활 균형 실태와 개선을 위한 정책 과제

구도희 0 8,382 2016.09.09 01:39
 
우리나라의 근로자들, 특히 취업 여성들의 일·생활 갈등은 전반적으로 심각한 편이다. 이는 직장에서의 장시간 노동과 남성 중심적, 일 중심적 문화 그리고 가정 내에서 남녀차별적인 성별 분업 등이 중첩되어 나타난 결과이다. 우리의 직장문화는 생산 제일주의, 경쟁과 성과주의, 직장 우선주의 등 철저하게 일 중심으로 짜여 있다. 직장에서의 장시간 노동은 근로자들이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 개인의 여가나 휴식시간, 지역사회 등에서 어울릴 시간 등을 침식해 왔다. 직장에서의 과도한 장시간 노동과 ‘직장 오로지 문화’는 직장에 다니는 남녀에게 가정에서의 역할이나 시간을 축소하고, 희생하는 것을 기반으로 형성되고 유지되어 온 것이다. 
이와 같은 직장 중심, 일 중심의 문화와 시간배분은 외벌이 모델을 전제로 하여 배우자나 가족구성원 가운데 누군가가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가정 내 분업을 가정하고 형성되었다. 직장생활에 대한 몰입은 사실상 가정 내 남녀의 성차별적 분업을 전제로 하고 있어서 남성들의 장시간 노동을 당연시 해왔고, 이러한 직장 문화에 여성들 또한 편입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 성공적으로 편입되지 못한 여성은 경력단절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남성 외벌이 모델에 기반을 둔 고용과 가족시스템은 여성들의 노동시장 진출 증가, 여성고용률 제고, 여성들의 평등의식 고양, 남성 외벌이로 생계, 육아, 교육 등의 곤란 등으로 더 이상 지속하기 어렵게 되어 가고 있다. 
 
 
일·생활의 불균형 실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근로자에게 일과 일이 아닌 다른 생활 영역은 반드시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가? 서구 학자들은 일과 생활이 상호 ‘갈등(conflict)’ 관계에 처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상호 ‘제고(enhancement or enrichment)’ 관계에 놓일 수도 있음을 지적한다. 우리나라는 일·생활이 갈등과 제고의 관계 중 어느 쪽에 가까울까? 맞벌이 여성들의 경우 일·생활의 갈등을 경험할 가능성이 높지만, 맞벌이 부부 가정의 모든 여성이 언제나 일·생활 갈등을 경험하고, 일·생활이 상호 다른 영역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제고의 상태를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생애주기의 특정 단계에서는 직장에 다니면서 동시에 가정을 꾸리고 사는 과정에서의 긍정적 경험이 부정적 경험을 압도할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정부나 기업들이 근로자 특히 여성근로자들의 일·생활 갈등을 줄일 수 있는 정책이나 제도들을 개발하는 데 중점을 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아직까지 공고하게 유지되고 있는 남성 외벌이 시스템과 규범 속에서 근로자의 일·생활 균형은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 제조업, 서비스업, 공공부문에 걸쳐 몇 가지 발견된 정형화된 사실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대부분의 산업과 직종 내 근로자들의 생활에서 직장 우선, 일 중심의 사고와 문화가 지배적이고 장시간 노동이 여전히 뿌리 깊게 상시화, 관행화되어 있다. 따라서 여가활동이나 지역사회는 삶의 우선순위에서 뒷전으로 밀려나 있다. 장시간 근로로 인해 삶의 다른 영역을 위한 시간을 확보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일·생활 균형을 확보하기 위한 기본적인 조건이 갖추어져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둘째, 남녀 성별분업 관행과 실천으로 인해 남성과 여성 근로자는 일·생활 갈등을 다르게 경험한다. 맞벌이 가정의 경우에도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에서 여성이 주된 책임을 지고 남성은 보조적이거나 거의 책임을 지지 않는 전통적인 가정 내 성별분업이 거의 변화하지 않았다. 이 경우 직장 여성들의 일·생활 갈등은 매우 첨예하게 나타나는 반면, 맞벌이 가정의 직장 남성의 일·생활 갈등 수준은 여성보다 높지 않다.  
셋째, 근로자의 일·생활 균형을 배려하기 위한 기업의 노력이 제한적이다. 사회적 변화 요구를 수용하여 일부 기업에서 선도적으로 일·생활 균형과 유연한 근무제도 등을 도입하고 있다. 그러나 기업문화, 경쟁과 성과주의 등 기업이 내외적으로 직면하는 요인 때문에 부분적으로만 활용되거나 실제 활용률은 상당히 낮은 편이다. 일·생활 균형을 촉진하거나 고무하는 제도로서 정착되려면 아직 멀었다. 
넷째, 생애주기의 특정한 시기 또는 근로자 개인이나 가정의 필요에 의해 고용을 유지하면서도 근무시간을 줄여서 일하거나 혹은 유연하게 할 수 있는 제도들이 매우 제한적으로만 갖추어져 있고, 도입된 제도(육아기 근무시간 단축제도, 부모육아휴직제도 등)도 기업문화나 사정, 인식의 부재 등으로 제대로 활용되지 않고 있다. 
다섯째, 직장에 도입된 제도도 근로자가 마음껏 활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근로자들은 개인이나 가정의 일·생활 균형을 위해 필요한 근무시간 단축이나 유연한 근무제도 등 일·생활 균형을 위한 제도를 선택하지 못하고 있다. 생애주기의 필요나, 개인이나 가정의 필요에 따라서 근무시간을 줄였을 때 감소한 소득을 대체할 수 있는 소득보전 메커니즘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설령 소득 상실을 감수할 의향이 있다 하더라도 기업 내의 성과주의나 경쟁체제, 인력의 부족으로 근로자가 자유롭게 일·생활 균형을 위해 근로 시간을 단축하기란 쉽지 않다. 일·생활 균형 관련 제도를 불이익을 받지 않고 사용하기에 직장 환경은 매우 불안하고 불편하다. 
여섯째, 맞벌이 가정에서 어린 자녀돌봄, 환자, 장애인, 노인 등 돌봄을 필요로 하는 가족 구성원이 있는 경우 돌봄에 대한 사회적 지원의 부족은 일·생활 균형을 더욱 위협한다. 보육시설, 노인요양시설의 부족은 직장생활과 돌봄을 병행해야 하는 여성에게 시간적 부담과 과로, 정신적 스트레스를 가중시킨다. 혹은 맞벌이 부부의 부모에 의존하거나 자부담으로 시장화된 서비스를 이용함으로써 해결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일·생활 균형 실태는 여성들의 고용이 크게 늘어가고 있는 중요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남성 외벌이 모델에 기반하여 형성된 각종 고용관행, 문화, 사회적 인식과 역할 기대 등 남성 외벌이 모델의 유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때문에 돌봄 책임이 있는 맞벌이 여성들의 일·생활 불균형과 갈등 수준은 다른 어느 집단보다도 높다. 
 
 
일·생활 균형 첫발인 일 중심 문화 개혁
우리는 현재 과거 남성 외벌이 모델에서 맞벌이 모델로 이행하고 있으나 이를 뒷받침하는 사회적 제도는 여전히 남성 외벌이 모델에서 형성된 것으로 제도적 지체를 겪고 있으며, 맞벌이 모델의 고용을 뒷받침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는 아직 정착되지 않고 그 실제 활용률은 떨어지고 있다. 2010년대에 만들어질 새로운 고용질서 속에서는 맞벌이 모델에 기초하여 남녀가 평등하게 일하고, 가정 내에서도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을 평등하게 나누어 맡으며, 근로자들의 생애주기 상 나타나는 개인이나 가정의 필요에 대해 국가, 사회, 기업, 개인이 각각 그 역할과 책임을 나누어 맡을 수 있는 일·생활 균형이 크게 개선된 제도를 만들어 내야 한다. 여성고용률 제고와 직장 여성들의 경력경로 보장, 기존 남성 외벌이 모델에서 부부 맞벌이 모델로의 전환을 촉진하고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일·생활 균형을 촉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면, 우리 현실에서 일·생활 균형을 촉진하기 위한 기본적인 개혁, 특히 노동시간과 관련된 개혁은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앞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우선 ‘직장 오로지’ 문화, 직장 최우선, 일 중심의 문화를 개혁해야 할 것이다. 사회적으로 가정과 개인생활, 지역사회에 대한 참여나 활동도 직장에서의 일과 비교하여 적절한 비중으로 새롭게 자리매김되고, 사회적 인식도 바뀔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이 직장, 가정, 지역사회라는 우리 생활의 세 가지 영역에 대한 적절한 위상과 시간 배분 없이는 일·생활 균형을 위한 기본요건을 갖출 수 없다. 직장 중심에서 직장, 가정, 지역사회 사이의 적절한 시간 배분과 위상 조정은 우리 사회 전반의 기존 인식과 사고방식의 변화를 필요로 한다. 이렇게 될 때 ‘저녁이 있는 삶’도 가능하고, 각 직장에서 장시간 노동 개혁에 대한 요구도 높아질 것이다. 
다음으로 남성 외벌이 모델에서 비롯된 가정 내 성차별적인 분업구조와 문화를 개혁해야 맞벌이 여성들에게 집중되는 일·생활 갈등을 완화하여 맞벌이 부부가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의 책임을 공유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가정 내 성차별적인 분업의 개혁은 동시에 직장에서 남성들이 가정에서의 일정한 역할을 하기 위해 노동시간의 단축이나 유연한 활용의 요구를 제기할 수 있는 기초가 될 것이다. 
셋째, 맞벌이 부부의 일·생활 균형을 위한 사회 인프라로서 보육시설과 전일제 학교의 확충, 보육시설 운영시간의 확대 등 복지시설과 제도를 대폭 확충하여 맞벌이 부부의 자녀돌봄 및 자녀교육과 관련된 부담을 사회화할 필요가 있다. 
넷째, 기업이나 공공기관의 장시간 노동문화를 개혁하기 위해 부족한 인력확충, 지나친 경쟁과 성과주의 문화의 개선, 낡은 교대제 개선, 생산성 향상, 노동시간의 효율적 관리 및 노동시간 단축에 따른 소득보전을 위해 일정한 소득대체 제도 등을 마련해야 한다. 
다섯째, 생애주기 상 근로자 개인이나 가정의 필요에 따라 근무시간의 길이, 근무시간대, 각종 휴가나 휴직 사용에 있어 자유로운 선택을 보장할 수 있도록 근로자들의 노동시간 조정 요구권의 범위 및 요건을 크게 넓히고, 복귀를 보장하며, 차별을 금지하는 법제도를 개정하거나 도입하는 것이 필요하다. 
 
 
일·생활 균형 촉진 위한 정부·기업·노조의 역할
일·생활 균형을 촉진하기 위한 큰 개혁의 방향을 잡았다면, 세부 정책과제들은 어떻게 시행할 수 있을까? 먼저, 정부 수준에서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지를 살펴보자. 정부는 노동시간의 유연한 활용과 일·생활 균형의 개선을 위한 특단의 조치를 실시해야 한다. ‘일·생활 균형 제고’는 남성 외벌이 모델에서 부부 맞벌이 모델로 이행하기 위한 기초조건으로서 여성고용률을 높이고 일터와 가정에서 남녀 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국정과제로 의제화할 필요가 있다. 국가 수준에서 노사정을 포괄하되 그보다 높은 국민적 수준에서 ‘일·생활 균형’ 이슈에 관한 논의를 전면화하여 여성들이 높은 비율로 노동시장에 참여하고 지속적으로 경제활동을 하며 정당하게 보상받는 맞벌이 모델이라는 새로운 고용질서를 창출하는 기반을 닦을 필요가 있다. 아울러 정부 수준에서도 고용노동부, 여성가족부, 행정자치부, 기획재정부 등을 포괄하는 범부처 수준의 ‘일·생활 균형 제고’ 추진본부 등을 만들어 정부에서 수행할 수 있는 관련 법제도 개정, 공공기관에서의 일·생활 불균형을 낳는 제도와 관행 시정, 남녀차별적인 비공식 관행의 발굴과 시정, 일·생활 균형 촉진을 위한 관행이나 제도의 도입과 정착을 위한 각종 시범사업 등을 전개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여성계, 경영계, 노동계, 각 지자체 등이 참여하여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 내고, 이를 바탕으로 참여단체나 기관들이 사업을 이끌어 가고 실천할 수 있도록 관련 회의나 추진체 등을 구성하고 세부적인 사업계획 등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일본에서도 내각부가 주관하여 관련 부처, 경영계, 노동계, 지방자치단체 등의 대표가 일·생활의 조화 추진 정상회의를 구성하여 일·생활 조화 헌장을 제정하고 행동지침을 정하였으며, 지역, 기업, 민간단체, 해외 사례나 활동을 소개하고 관련 자료를 공개하는 등 지속적인 캠페인을 벌이고 있으므로 참고할 만하다. 
아울러 이런 법제도 시행의 실효성을 담보하기 위하여 공공기관에서 모범적으로 제도를 실시하고 정착시키며, 현재 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전환형 시간선택제를 근로자들의 일·생활균형을 위한 목적으로 널리 사용할 수 있도록 공공기관이 앞장서서 제도를 도입하고 정착시킬 필요가 있다.
기업들도 향후 다가오는 노동력 부족에 대비하고, 잘 교육된 인력의 활용, 뛰어난 여성인재의 활용을 위해서 그리고 성차별적인 비공식 관행이나 문화를 개혁하기 위해서 다양한 여성친화적, 적극적인(affirmative) 고용조치, 일·생활 균형을 촉진하는 노동시간 제도와 관행 등을 적극 도입할 필요가 있다. 또한 앞선 기업들이 이와 같은 제도나 관행들을 도입하고도 정착시키거나 널리 활용하지 못하는 것을 개선하기 위해 기존의 지나친 직장 중심, 일 중심, 남성 중심적 문화나 관행 그리고 경쟁과 성과주의 문화도 동시에 개혁해야 할 것이다. 
노동조합이나 여성계 등에서도 근로자들 특히 맞벌이 부부의 일·생활 균형에 대한 요구를 현장에서 다양하게 수렴하여, 기업수준에서 사용자들과 더불어 일·생활 균형을 촉진할 수 있는 각종 제도나 관행 등을 단체협약이나 노사협의 등을 통해서 도입하고, 현장의 이행 여부를 감독하려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향후 여성들의 노동시장 진출이 늘어감에 따라 음성적이고 비공식적인 남녀차별의 관행 및 남성 위주의 직장문화에서 벗어나 여성친화적인 각종 휴가나 근무제도의 도입과 정착에 그동안 임금인상을 위해 쏟았던 관심과 노력만큼의 정성과 에너지를 쏟아야 할 것이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9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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