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노동자’에게 재판은 무엇인가

노동사회

‘한국 노동자’에게 재판은 무엇인가

편집국 0 4,471 2013.05.22 10:00

재판은 무엇인가? 너무 막연한 질문이다. 사람마다 다른 대답을 할 것이다. 누구는 솔로몬을 말하고 누구는 변사또를 들먹인다. 누구는 실체를 말하고 누구는 절차를 말한다. 그럼 다시 묻자. 노동자에게 재판은 무엇인가? 노동자에게 재판을 묻는다는 것은 자본주의 국가의 재판에 대하여 묻는 것이다. 계급적 이해가 담긴 보다 구체적인 대답이 나올 것이다. 자본주의 국가의 재판이 노동자에게 공정할 수 있는가라는 원론적인 문제가 제기될 것이고, 누구는 노동자의 권익을 지켜줄 판사를 말할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묻는다. ‘한국 노동자’에게 재판은 무엇인가? 

대답이 단순하지 않다. 이 질문은 한국 자본주의 국가의 문제와 한국 노동운동의 성과와 한계를 그대로 보여주어야 하는 문제로 전환된다. 그 대답은 재판 일반의 문제가 아닌 노동운동의 한계 문제로 귀결되고 만다. 국가를 말하지만 ‘우리’를 말하게 된다. 국가를 비판하지만 노동운동의 한계를 말하게 된다. 재판의 문제점을 말하지만 노동운동의 과제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법원 그 ‘자체’ 때문에 체념하는 노동자

전국금속산업노동조합연맹(금속연맹)에서 상근을 시작한 지도 벌써 8년째다. 연맹 법률원을 만들고 조합원 여부를 떠나 노동자들을 대리하고 변호하여 왔다. 수많은 사건을 맡아 처리해 왔지만 사용자 또는 검사가 대변하는 국가와 대등하게 맞서왔다고 생각해보지 못 했다. 노동자니까, 한국의 노동자니까, 보호받을 수 있다는 기대보다는 보호받을 수 있을까 하는 ‘체념’이 늘 앞섰다. 말도 되지 않는 법리와 싸우면서 그 부당성에 대하여 반복해서 준비서면에, 변론요지서에, 쓰고 또 쓸 뿐이었다.

전관예우니, 접대니, 전별금이니, 연고 등 판사와의 친소관계니 따위의 전근대적인 한국의 사법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전관예우 등 전근대적인 관행이 문제라면 체념할 필요가 전혀 없다. 그것은 사법제도의 왜곡이고 일탈일 뿐, 사법제도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이 나라 노동자들이 법원에서 느끼는 체념은 다르다. 법원, 사법제도 ‘자체’에 대한 것이다. 물론 노동자들도 자신의 권리를 법원에서 구제받는다. 단, 노동자라서 구제받는 것이 아니라 그 권리가 법령상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구제하여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노동사건’, 즉 노동자이기 때문에 침해받는 권리에 있어서는 전혀 다르다.

우선 법령이 권리로서 보호해주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설사 권리로 보호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법원에서 실제 구제받기가 쉽지 않다.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헌법 제103조)한다는 법관은 노동자를 대표하는 자가 아니고, 법원 역시 노동자이기 때문에 침해받는 권리를 보호할 수 있는 특별한 제도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노동자는 뇌물비리판사 조관행 혹은 대법원장 이용훈 때문이 아니라, ‘한국 법원’ 그 자체 때문에 체념하는 것이다.
h7420_02.jpg
[ 8월16일 전국법원장회에어 법조비리와 관련해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있는 이용훈 대법원장.   ▷ 오마이뉴스 ]


법관의 ‘독립적인 판단’을 믿~쑵니까!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하는 판사는 높은 법대에 앉아 피고인을 내려 보며 권위 있게 말한다.
“실정법을 어긴 것 아니냐. 처벌할 수밖에 없다.”
오늘도 검사에 의해 기소되어 재판을 받고 있는 노동자는 불법적인 파업 투쟁했기 때문에 처벌받아야 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모든 것을 판사의 처분에 맡긴 듯 체념한 채 말한다.
“싸우기 위해서는 법을 어길 수밖에 없다. 싸울 수밖에 없는 현실을 보아 달라.”
노동자의 석방을 위해 변호를 해야 하는 변호사는 피고인과는 멀리 떨어진 변호인석에 앉아 말한다.
“실정법을 위반한 것은 사실이지만 정상을 참작하여 최대한 관대한 처벌을 해 달라.”
이것이 이 나라 노동형사사건 법정의 모습이다. 노동기본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고 있지 않은 한국 ‘실정법’하에서 지겹도록 보아온 모습이다. 행정소송, 민사소송은 이와는 다소 다르다.
재판장인 판사가 법대 위에서 말한다.
“원고, 피고. ○○자 준비서면 각 진술하고, 더 제출할 증거 없지요? 이 사건 결심합니다.”
원고, 피고측 소송대리인 변호사는 말한다.
“예.”

월차휴가를 내고 참석한 노동자는 아무 말도 못하고 판사들의 성향이 어떠한지 혹시 회사가 손을 쓰지는 않을지, 회사 변호사가 전관이 아닌지 불안해하며 변호사에게 물어보겠다고 생각하다가, 지난 번 변호사 사무실에서 자신의 사정을 담아 작성한 서면을 변호사가 필요 없다면서 쓰레기통에 버리던 장면을 떠올리고는 씁쓸해 하며 법정을 나선다.

노동기본권의 행사를 범죄행위로 처벌하는 단결금지 법리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법에 따라 재판을 하고, 노동자(대표)의 참여가 배제된 한국 법원의 풍경이다. 여기서 한국 사법제도의 주체가 누구인지, 노동자는 어떠한 위치에 있는 것인지가 그대로 드러난다.

노동사건은 자본과 노동의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한다. 노동과 자본이 모두 배제된 채 ‘독립’적인 법관에 의하여 재판이 진행된다고 하여 이것이 문제될 것이 무엇인가라고 물을지 모른다. 이러한 의문이 타당하기 위해서는 그 법관이 노동현실과 노동법에 대하여 제대로 알고 있고, 노동과 자본에 대하여 가치적으로 중립을 지킬 수 있는, 그야말로 '독립된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특히 매일 언론을 통해 자본의 선전공세만이 일방적으로 주입되고 있는 한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러한 독립적인 판단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 법관이 자본의 가치에서 독립되어 판단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기 어렵다.

어제 노동의 가치로 무장했던 자들도 자본의 공세에 넘어가 오늘은 노동을 공격하는 데 앞장서고 있는 실정이다. 결국 노동자의 이해를 대변할 수 있는 자가 직접 재판에 참여하지 않는 한 노동사건에서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기는 어렵게 될 수밖에 없다.

노동현실 아는 사람이 하는 재판, 정녕 꿈일까?

몇 해 전 ‘노동법원’의 도입을 위해 토론회를 열고 책자(『노동과 법』, 제4호)를 발간한 적이 있다. 당시 도입을 주장한 노동법원은 노동사건을 집중하여 처리하는 법원이 아니었다. 노동자이기 때문에 침해받는 권리를 공정하고 효율적으로 구제하여 줄 수 있는 법원, 사법제도를 도입하자는 것이었다. 노동자를 대표하는 자가 판사가 되어 재판에 관여하고 노동자가 쉽게 법원을 이용할 수 있도록 인지대 감면 등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자는 것이었다.

시민의 재판참여, 사법제도 개혁 등 근대사법제도의 확립을 주장한 것도 아니었다. 노동만이 일방적으로 유리하도록 하자는 것도 아니었다. 노동과 자본을 대표하는 자가 판사로, 법률전문가인 전문법관과 함께 재판을 진행하고 합의하는 구조를 도입하자고 하였을 뿐이다. 소박하게, 제발 ‘노동현실’과 ‘노동법’을 아는 자가 참여하여 재판을 진행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 보자는 것이었다. 이후 노동법원에 관한 본격적인 논의가 진행되었고, 사법개혁의 일환으로 노동법원제도의 도입이 다루어지고 있으나, 경총 등 자본은 그 도입을 반대하고 있는 실정이다.

최고 투쟁력과 최하 사법제도가 말하는 것

한국 노동법은, 무엇보다도 집단적 노사관계법은 노동기본권의 ‘보장’이 아닌 ‘제한’과 ‘금지’에 관한 법이다. 이를 노동자의 참여가 배제된 법원에서 반복적으로 확인하여 오고 있을 뿐이다. 세계 최고의 투쟁력을 자랑하는 한국 노동운동과 최하 수준 노동기본권 보장 및 사법제도의 공존,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노동기본권 보장과 사법제도는 노동자 전체의 이해와 관계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한국 노동운동이 한국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관철하는 데 제대로 그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는 것이 된다. 한 나라의 노동과 관련된 법률과 제도의 보장수준을 살펴보면 그 나라 노동운동의 성취를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노동운동은 한국 자본주의에서 노동계급의 이익을 대변하지 못하고 다른 무엇인가를 위해 노동운동의 ‘투쟁력’을 쏟아온 셈이 된다.

그 다른 무엇인가는 바로 기업차원의 조합원 임금 등 근로조건의 향상이었다. 그 수많은 투쟁은 노동조합 조합원의 개별적인 이해를 관철하기 위해 바쳐졌다. 이것이 1953년 전시상태에서 노동법이 제정된 이후 현행법에 이르기까지, 단 한 차례도 노동기본권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법개정을 관철하지 못한 까닭이다. 노동자이기 때문에 침해받는 권리를 구제받기 위한 사법제도를 도입하지 못한 까닭이다. 한 차례라도 ‘노동법원 도입’을 위해 투쟁을 한 적이 있었던가. 노동운동은 기업을 넘어서지 못하였고 조합원들의 이해에 매몰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었고, 그럴 힘도 없었다. 거창한 구호와 수만 명의 행진은 노동자계급의 제대로 된 이해 관철 측면에서는 초라한 구호였고 맥 빠진 행진이었을 뿐이었다. 

 굴욕과 협력과 노사평화, 그리고 노동법원 

이제 노사평화와 협력을 당당히 대놓고 외치는 ‘노사협조주의의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노사평화와 협력을 외치는 자는 노동자의 양보만을 말할 뿐 사용자에게 노동자를 위해 양보할 것을 말하지 않는다. 노동권을 약화시키는 법제도의 개정을 ‘선진화’라고 주장하지만, 진정 노사협조주의 나라에서 어떠한 법제도가 보장되어 있는가에 대하여는 알지 못한다. 노사협조주의 나라 독일에서 노사협력은 단순히 사업장에서의 노동자의 침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업장에서의 중요경영사항에 대한 노사의 ‘공동결정’은 물론이고, 국가부문 즉 입법, 행정, 사법에 이르기까지 노동과 자본의 공유와 협력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있다.

특히 사법에 있어서 노동과 자본이 추천한 자가 판사로 참여하여 전문법관과 함께 재판하는 노동법원이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노동법원은 운영과 전문법관의 임면에 대하여도 노동조합의 의견을 묻고 이를 반영한다. 이러한 제도적 보장 속에서 노사평화와 협력이라는 ‘노사협조주의’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고, 노동자가 침해된 권리를 보호받을 기대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의 법원은 노동운동을 범죄와 불법행위로 낙인찍는 법률에 따라, 노동자의 참여가 배제된 채 독립된 법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렇게 운영되는 한국의 사법제도에 대하여 노동운동이 침묵하는 것이 노사평화가 평가될 수 없다. 노동자의 이해를 대변하지 못하고 방관하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외치는 노사평화와 협력은 자본에 대한 노동의 굴욕일 수 있다.

비로소 출발선에 선 노동운동의 도약을 위하여

지난 6월 현대자동차노조 등 대규모노조가 산별노조로의 전환을 결의하였다. 이제 금속산별노조는 새로운 토대를 마련하게 되었다. 기업을 넘어 전체 노동자의 이해를 대변할 조직으로 전환될 가능성을 연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능성일 뿐, 산별노조가 조합원의 이해를 넘어서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관철하는 데 나서게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노동조합의 규약 규정 등 조직체계를 노동자 전체의 이해를 대변할 수 있는 것으로 세울 수 있을 때 가능성은 현실로 전화될 것이다.

과연 산별노조가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인지 여부를 판단하는 데 있어서, 노동법원의 도입을 위한 투쟁을 하는가도 중요한 척도가 될 것이다. 그러나 갈 길은 아직 멀다. 조합원은 단체협약에는 관심이 있어도 노동법 개악에 대하여는 무관심하고, ‘조관행’의 비리는 비판해도 한국의 사법제도는 비판하지 못하며, 노동사건을 처리하는 노동법원은 알고 있어도 노동자(대표)가 참여하는 노동법원은 알지 못한다.

현재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서 비로소 변화의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운동이 개별 노동자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고 전체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운동이라면, 한국 노동운동은 이제 비로소 출발선에 섰다. 정말로, 이제 시작이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13호